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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로티를 사랑한 사자 단상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 별명이 '사자'인 친구가 있었다. 성격이 포악해서도 아니었고 얼굴 생김새가 사자를 닮아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 친구의 독특한 헤어 스타일이 사자 갈기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그 시절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학생들에게 일명 '스포츠 머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교칙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세련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3주에 한번씩은 이발소를 애용해 줘야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발비를 아끼기 위해 석달에 한번씩 이발소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는 이발소를 갈 때마다 머리를 거의 삭발에 가깝게 깎았다. 그렇게 머리를 자르고 나서 석달 남짓이 되면 그의 머리는 앞/뒤/옆이 고르게 자라서 전체적으로 풍성한 '갈기'를 형성하곤 했다. 선생들은 비록 그의 머리가 교칙에 어긋날 정도로 길어도 워낙에 멋내기와는 거리가 먼 헤어 스타일이기에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이발비를 아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모로 그의 생활 방식은 독특했다. 그 친구의 필통에는 그 흔한 모나미 볼펜이나 제도 샤프 하나 없었다. 그는 항상 연필만을 애용했다. 그것도 4H 연필만을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연필 중에 4H가 가장 연필심이 단단해서 잘 닳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신 4H 연필은 그만큼 진하게 써지지 않기 때문에 그는 항상 손에 힘을 꽉주고 필기를 하곤 했다. 심지어 그는 남들이 다쓰고 버린 모나미 볼펜 자루에 몽당연필을 끼워서 더 이상 볼펜 자루에 끼울 수 없을 만큼 짧아질 때까지 썼다. 가끔 - 정말 가끔 - 새 연필을 사서 필통에 넣어둘때면 그는 마치 남들이 '게스 청바지'나 '안전지대 점퍼'를 입고 온 날만큼 뿌듯해 했다.

 지금도 그런 숙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매일 연습장에 공부한 흔적을 남겨서 그걸 검사받았다. 일명 '빽빽이'라고 불리던 그 숙제 검사를 할 때마다 그는 담임에게 혼나곤 했다. 왜냐하면 남들은 하루에 2,30 장씩 '빽빽이'를 채우는데 그 친구는 10장을 넘어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가 연습장을 아끼기 위해 남들이 대,여섯장에 걸쳐 쓸 내용을 한 장으로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사실로 따지면 그는 우리 반에서 가장 열심히 '빽빽이' 숙제를 하는 친구였다.
 심지어 그는 그렇게 빽빽해서 더 이상 쓸 공간이 없어진 연습장 위에 다시 빨간색, 혹은 파란색 볼펜으로 겹쳐서 수학 문제를 풀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곤 했다. 그가 유일하게 볼펜을 사용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습장을 재사용하기 위해 그는 가끔 이미 제출한 '빽빽이'를 검사가 끝난 후 담임에게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담임에게 한 대씩 쥐어박히곤 했다. 담임은 돌려받은 '빽빽이'를 다시 제출할까봐 그런 것이었고 그런 의심을 받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하곤 했다. '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볼펜으로 쓰겠다니깐요!'

 그런 그에게 있어 내가 아는 유일한 '낭비'는 영화 보기였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이 집에 가서 신나게 PC 게임을 하거나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거나 당구장에 가거나 혹은 - 소위 노는 아이들이면 - 노래방에 갈 때(그 당시 노래방이 처음 생겼고 그 때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그는 항상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을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보곤 했다. 그는 '미션'을 대략 15번 정도 봤노라고 말했다. 절대 뭔가를 낭비하지 않는 그가 그 정도로 돈을 쓸 정도의 영화라면 정말 대단한 영화일 것이라 생각한 난 그래서 '미션'을 빌려봤고 나 역시 지금껏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고 있다.

 고1 겨울이 끝나갈 무렵 그는 나에게 공연 티켓 한장을 꺼내 보이며 자랑했다. 그것은 파바로티 내한 공연 티켓이었는데 무려 십 만원이 넘는 R석이었다. 그는 그 티켓을 소중한 눈길로 바라보며 파바로티가 얼마나 위대한 테너인지 그리고 파바로티의 현재 나이로 미뤄볼 때 아마 이번 내한 공연이 최초이자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라고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뭐 사실 그 이후에도 두어 차례 더 왔다). '파바로티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는 그렇게 말했고 그래서 난 굳이 그 친구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파바로티가 얼마나 위대한 테너인지 알것 같았다.

* * *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연락이 끊겼고 지금껏 잊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저께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문득 나에게 '파바로티'와 '미션'을 알게 해준 그 친구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덧글

  • 성훈 2007/09/10 20:08 # 삭제 답글

    글 진짜 잘쓴다.. 이제 은조 수필책하나 내도 되겠다.. ㅋㅋ
    요전날에 새벽6시에 현우한테 전화왔다. 그녀석 싱겁게 당진발전소 옆을지난다며.. 너 다니는 회사맞냐고..
    묻더라. 그래도 그렇게 목소리라도 들으니 좋더라고.
    건강해라.
  • silverbird 2007/09/11 23:01 # 답글

    // 성훈
    언제 현우랑 같이 함 뭉쳐야 되는데 말이지...
  • aidos 2007/09/18 22:40 # 답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저도 무척 궁금하네요. 사자 분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며 살고 계실지...
  • silverbird 2007/09/19 19:36 # 답글

    // aidos
    그러게요 잘살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 성훈 2007/09/24 23:15 # 삭제 답글

    머여.. 요즘 무슨일있냐. 왜 글이 없데이트가 안돼는거여..ㅋ 추석지나걸랑 업데이트해라잉..
  • silverbird 2007/10/02 13:26 # 답글

    //성훈
    니가 요즘 마이 심심하구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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