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존중하는 능력

 얼마 전 이전 회사 팀장님을 만나 저녁 식사와 함께 가볍게 반주를 하....려고 했으나 분위기가 무르익는 바람에 다소 거나한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팀장님 역시 한달 쯤 전에 회사를 옮겼기에 팀장님이 옮기신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듣게 되었다.
 
 그 회사는 직원 수가 100명이 좀 안되는,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작은 규모는 아닌 게임 회사인데 몇 주전 새로운 CTO가 왔다. 이 CTO는 부임하자마자 약 2주 동안 매일 팀장 회의를 하면서 팀장들을 강하게 몰아붙였고 여기에 기술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거나 소위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이는 팀장들에게는 노골적인 압박을 가했다(나도 그 CTO분을 알고 있는데 이 분의 순간적인 말빨을 당해내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그 분의 논리나 말빨이 지극히 순간적이라는데 있지만...).
 어쨌든 이걸 견뎌내지 못한 반수에 가까운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뒀고 그 자리는 CTO가 이전에 같이 일했던 이전 회사 직원들로 채워졌다. 물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나로써는 퇴사한 직원들이 정말 너무나 무능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CTO의 취향문제인지 혹은 정치적인(정치라는 좋은 말이 이렇게 변질된게 좀 가슴아프지만...) 문제가 얽힌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 선배 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임원급 인사가 단행되고 나면 언제나 수많은 자리 이동이 뒤따른다고 한다. 소위 '자기 사람 끌어오기' 혹은 '줄타기'인 것이다.
 이런 건 기업뿐만이 아니다 비단 현 정부뿐만이 아니라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 정책 및 인사의 변화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학창시절에 분명 '백년지대계'라고 배웠건만 교육정책은 교육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매번 크게 바뀌곤 한다.

 한 고조인 유방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고조는 소하에게 나랏일을 맡겼다. '군막을 치고 천 리 밖에 나가 승리할 수 있는 모책을 내는 데는 장량만한 사람이 없고, 전선에 나가 적을 무찌르는 데는 한신만한 인물이 없으며, 군량과 마초 등의 물자를 공급하여 치국안민하는 데는 소하만한 사람이 없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하는 국정 운영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고조가 죽고 혜제가 뒤를 이은 후에도 소하는 계속 나랏일을 도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게 되었다. 여기서 소하의 뒤를 이어 친구이자 같은 개국공신이었던 조참이 재상에 오른다. 그런데 조참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데 온 힘을 쏟았던 소하와는 달리 재상이 되고 나서 전혀 일을 하지 않고 매일 음주가무만 즐겼다. 그래서 이 사실을 전해 들은 혜제가 조용히 그를 불러 책망하자 조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폐하께서는 제가 소하보다 능력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 소하가 이미 만들어놓은 제도와 정책이 훌륭하며 따라서 그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자리에 대한 책임감과 동시에 무언가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업적을 이루어야 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소위 '밥값'을 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명감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게 되면 말그대로 '오바'하게 된다. 위의 조참의 예는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바로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명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egoing님의 블로그에서 '현재는 전 인생을 통털어 가장 뛰어나지만, 과거의 밀도는 언제나 현재를 압도한다.' 라는 글귀를 보았다. 현재는 과거의 과오를 볼 수 있기에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치게 된다. 그러다보니 과거를 엄신여기기 쉽다.  하지만 과거는  현재의 순간으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스냅샷이 아니다. 과거 속에는 현재의 순간이 간과하기 쉬운 길고도 극적인 과정들이 숨어 있다. 그런데 이걸 너무 쉽게 판단해버리면 역시 '오바'하게 된다.

 변화란 분명 좋은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 이전에 기존의 것들에 대한 신중한 평가와 고민이 있어야 '오바'하지 않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겠다. 심지어 때론 그냥 과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p.s. 이런 경우 일을 하는 본질적인 목적을 생각한다면 과거를 유지하는게 가만이 있는게 일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

by silverbird | 2008/06/21 19:58 | 단상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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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ego + ing at 2008/06/23 10:44

제목 : 시간이라는 장사
또 다른 시간의 자신과 경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다 보면 예전에 만들었던 것에 손을 대야 하는 경우가 있다. 흘러간 시간만큼 새로운 것들을 경험했고,이해했기 때문에 과거의 것들은 이미 조악한 것들이 되어있기 마련이다.그래서모니터 밖에 있는 지금의 나는 점령군이 되어 과거의 내가 만든 것들을 거침없이 유린한다.새로운 코드는 훨씬 빠르게 완성됐고,과거에 대한 자신감은 세련된 코드를 과시한다.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정작......more

Commented by egoing at 2008/06/23 10:50
침묵도 표현이고,
싸우지 않는 것도 용기일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행동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참의 예는 솔직히 좀 모호한 감이 있지만 ㅋㅋ
좋은 글 잘 봤습니다.
Commented by silverbird at 2008/06/24 13:45
감사합니다. 저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처로 at 2008/06/23 11:28
감동받았어요.
Commented by silverbird at 2008/06/24 13:46
뭐...감동받을 것까지야...그냥 커피 사주면 됨...흐흐흐
Commented by 지민아빠 at 2008/06/24 13:55
커피 사주실땐 저도 불러주시는 센스
Commented by 짱구엄마 at 2008/06/25 11:08
팍팍 와닿네요~~ 캬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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