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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능력의 종말 단상

 1. 예전에 조정래 작가의 인터뷰 기사에서 아들이 장가를 가자마자 며느리에게 자신의 소설 '태백산맥' 전 권을 원고지에 옮겨 적는 일을 시켰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 이유인 즉슨 '며느리가 이제부터 자기 소설에서 나오는 인세 덕을 보고 살텐데 자신이 겪었던 창작의 고통을 일부라도 느껴봐야 그 돈 귀한 줄 알고 알뜰하게 살림하지 않겠느냐?' 는 것이었다. 
 보통 장편 소설이 원고지 1000매 내외니까 아마도 '태백산맥' 정도면 수 천 매는 족히 넘어 갈 것이다. 대충 원고지 5000매라고 가정했을 때 한 장 옮겨 적는데 5분 걸린다고 치고 하루에 8시간 씩 꼬박 매달리면 약 50일이 좀 넘게 걸리는 양이다. 순수하게 옮겨 적는데만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 정도면 육체적으로도 충분한 노동이다.
 
 2. 얼마 전 무릎팍 도사에 김홍신 작가가 나온 것을 봤다. 우스개 소리처럼 원고지 매수를 채우기 위해 온갖 수식어 등을 갖다 붙여가며 문장을 늘리던 경험담을 이야기 했다. 우스개 소리처럼 말했지만 아마 그 당시에는 정말 똥줄타는 느낌이었을 게다. 

 3. 김애란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1980년 생인데 불과 스물 여섯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으며 말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한 '문학계의 수재'다. 고작 단편 소설집을 두 개 냈는데 평단에서도 호평 일색이고 젊은 작가 중 가장 큰 기대주로 꼽히고 있는, 암튼 잘나가는 작가다. 글을 참 맛깔나게 잘 쓴다. 어느 한 평론가가 '그녀에게 지금 남은 도전 과제는 장편 소설을 얼마나 훌륭하게 써낼 수 있는가 이다.' 라고 했었다. 나도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아직 그녀의 장편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 내용의 훌륭함을 떠나 일단 수 백 페이지 혹은 그 이상이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보면 일종의 무조건적인 경외감이 느껴진다. 심지어 그렇게 방대한 분량인데도 전체적으로 큰 흐름을 놓치지 않고 술술 익히는 책이라면 정말이지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전율이 느껴질 때도 있다. 
 누군가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며 미안해 했다고 하지만 그건 요점없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조언에나 어울릴 일화일 뿐이고 실상은 긴 글을 쓰는 것이 짧은 글을 쓰는 것보다 어렵다. 그것은 그만큼 끈기와 정성 때론 피폐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을 강인함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글쓰기가 유행하고 대부분의 정보를 웹에서 얻게 되면서 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되지 못하는 듯 싶다. 정보의 바다 속에서 이제 조금만 긴 글은 스크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외면받는다. 이제 그 자리는 재치있는 글 한 마디나 짤방이 대체한다. 심지어 요즘은 한 줄짜리 문장들을 툭툭 던지듯이 사용하는 트위터나 미투데이 같은 서비스가 유행하고 있다. 기존의 출판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요즘 서점에 가면 기존에 인기를 끈 유명 교양 서적이나 철학 서적을 요약해서 짧게 추린 책들이 제법 눈에 띈다. 긴 호흡, 깊은 사색따위는 필요없다. 급하게 들이키고 가쁘게 내뱉는다.

* * * * *

 위에 글은 약 1년 쯤 전에 써놓고 비공개 상태로 묵혀뒀던 글이다. 나는 보통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 일필휘지하듯 한번에 써서 올리는 경우가 드물다(그럴 능력도 없다). 대개는 일단 비공개로 써서 올려놓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다시 글을 확인해 본다. 그렇게 시간을 두고 읽어 보면 글을 쓰던 당시의 들뜬 기분이 가라 앉고 보다 객관적으로 내 글을 평가해 볼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글을 다듬고 나서야 비로소 글을 노출한다.

 이 글 역시 당시에는 긴 글을 읽지 않으려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한 글이었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다소 편협한 생각인듯 싶어 끝내 글을 결론짓지 못하고 묵히고 말았다. 

 글을 읽는 능력은 중요하다. 대부분의 중요한 정보들이 문자로 되어 있고 그런 대량의 정보를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긴 글을 잘 쓰는 능력 역시 중요하다. 대량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있다. 위에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인류가 생산하는 정보의 양은 이제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 구글의 CEO인 에릭 슈미츠는 '인류가 태초부터 2003년까지 만들어낸 양만큼의 정보를 이제는 단 이틀만에 생산하고 있다.' 고 말했다. 심지어 (믿기 힘들지만) IBM의 2006년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인류가 생산하는 자료의 총량은 11시간마다 두배로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긴 글을 읽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더 이상 현명한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원본 텍스트로 차근차근 읽어서 확인하고 필요한 것을 습득하기에는 노출되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다. 관심있는 정보만을 선별해서 구독하는 RSS 리더에는 수많은 글들이 쌓여가고 트위터에는 관심가거나 흥미로운 트윗들이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긴 글을 읽는 독서 능력이 아니라 짧은 글들을 빠르게 훑어 보고 클릭해 들어가는 능력인 것 같다.

 마치 옛날에는 수렵/채집 혹은 농경 활동이 주요 생산 활동이었고 그래서 그런 능력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듯이 독서 능력도 극히 일부의 전문직 종사자만 수행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그런 세상이 온 것이 아닐까?

 MIT 미디어랩의 네그로폰테 교수는 '빈번하게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링크를 클릭하느라 긴 글을 읽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퇴화가 아니라 미디어 발달에 따른 자연스런 적응일뿐인지도 모른다. 이제 독서는 반드시 갖추어야할 소양이 아니라 그저 읽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는 일부 매니아들을 위한 취미 활동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수능 언어 영역 시험 문제 유형도 바뀌어야 하지 싶다.


덧글

  • 세시아 2010/09/14 20:00 # 삭제 답글

    일단, 조정래씨 생각대로 xxx 로군요. 뭐 과거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베트남이나 연변에서 며느리를 들였다고 해도 저런 짓은 못 시켰을 것 같은데..

    정보의 양의 증가에 대해서는.. 글쎄요. 조금 회의적. 까놓고 말해서 저 태반은 비디오 아니겠어요?
  • silverbird 2010/09/17 09:28 #

    말씀하신대로 물리적인 양으로 봤을 때 비디오와 같은 고용량 데이터의 증가가 전체 데이터 양의 폭발적인 증가의 주요 원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순수한 정보량의 증가도 무시못할 수준인 것 같습니다. ^^
  • 장모군 2010/09/27 12:56 # 삭제 답글

    주인장님, 한탄 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만,
    한탄하시는 것 같아요.
    맞나요? 지나가다 궁금해서요..

    제 생각에도 늘어나는 자료는 데이타 베이스 서버안의 숫자들 아닐까요.
    글로 읽을 수 있는 양서는 크게 늘지 않는 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책도 정말 많기 때문에, 다 읽기는 힘들죠
    저는 누군가 이거 이거 읽으세요 해 주면 고마울 것 같아요.
    그래서 구글 리더에서 누군가 그런 글을 올려주면 별표를 쳐 놓습니다. -_-;;;
    별표를 쳐두면 언젠가 나도 그 원본을 읽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본질이 아닌 주변의 메타 데이타는 확실히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 silverbird 2010/09/30 12:39 #

    말씀하신 데이터 베이스 서버안의 숫자들이 늘어나면서 기존에는 모르거나 시도할 수 없었던 다양한 가치의 데이터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양질의 데이터와 그 외 나머지...였다면 요즘은 '그 외 나머지'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새로운 '양질의 가치'를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창발(emergence)' 이지요.
  • silverbird 2010/09/30 12:40 #

    아 참 그리고 한탄하는 건 아닙니다. :)
  • 2010/11/06 17:1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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