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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내가 읽은 책들

 요즘은 도통 신문을 읽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신문마다 사회면 한 귀퉁이엔 이런 저런 찌라시 기사들을 모아 놓은 작은 코너가 하나 있었다. '휴지통' 이니 '현미경' 이니 '돋보기' 니 하는 제목을 가진 이 코너엔 간통 현장이 들통나 급하게 도망가다 추락사한 불륜커플의 이야기나 명절 친지들이 모여앉아 벌인 고스톱 판에서 벌어진 다툼 같이 이런 저런 일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 사고들을 제목도 없고 단락 구분조차 하지 않은 채 사건의 개요만 주욱 나열해 놓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이 찌라시 기사들을 좋아했다. 보통 매일 저녁 신문이 오면 나는 가장 먼저 16면에 있는 TV 프로 안내를 보고, 15면에 있는 '나대로 선생' 만화를 보고 나면 그 다음에 사회면의 이 찌라시 기사들을 읽곤 했다. 

 김훈의 소설 '공무도하'는 바로 이 찌라시 기사를 닮아 있다. '현미경' 이나 '돋보기'의 기사들이 그러하듯이 '공무도하'는 머릿말도 목차도 없고 챕터를 구분하는 소제목도 없이 표지를 넘기고 나면 바로 시작하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인물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건조한 문체로 나열되다가 끝난다. 

 냉정하게 말하면 '공무도하'는 이전 김훈의 작품에 비하면 졸작에 가깝다. 난 이 책을 읽고 이문열의 '오디세이아 서울'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툭 세상에 내놓았던 그 - 읽는 사람도 당황스럽고 쓴 사람도 멋적었을 '이건 뭥미' 수준의 - 졸작말이다. 

 심지어 김훈은 여러 모로 이문열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 주의 성향의 남성 작가라는 점, 둘 다 마초 기질을 대놓고 들어낸다는 점, 엄청난 필력을 자랑한다는 점 등등...그런데 이 책을 통해 또 하나 비슷한 점이 생겼다. 그래서 김훈 역시 이 책을 계기로 더 이상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단지 졸작이라고 폄하하기 어려운 이유는 나에게 딱히 설명하기 힘든 묘한 정서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작가의 글에서 김훈은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라고 썼지만 정작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이리 저리 얽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얽힘이 나에게 알 수 없는 공감을 느끼게 해준다.

 30 여 년을 신문 기자로 활동했었기에 어쩌면 이 책의 이야기들은 상당수 그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이런 저런 사건 사고를 통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단지 '아무개'씨로 통칭하고, 그들 각자가 갖고 있는 사연들을 2~3줄의 건조한 문체로 추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 구구절절한 이야기로 다시 풀어냄으로써 사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스개 소리로 '이별을 하게 되면 모든 노래 가사가 다 자기 얘기 같다.'라고 하는데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저마다 2~3줄 찌라시 기사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소설같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게다. 심지어 그들 각자는 미처 모르고 있는 다양한 인연으로 서로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장에 난입한 간통녀의 남편을 피해 난간에 매달려야 했던 불륜 커플남은 명절 기념 친목 도모 고스톱판을 이종 격투기장으로 만든 손윗 동서와 같은 국민학교 같은 반 단짝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손윗 동서는 간통녀의 남편과 같은 구청장 배 웅변대회에서 반공을 힘차게 외치던 이 연사였을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쩌면 적어도 그 셋은 같은 출근 버스 혹은 지하철 2호선 같은 칸을 이용하는 손님이었을 수도 있다.

 언젠가 책을 선물해달라고 했던 누군가에게 이 책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 때는 그저 얇고 가벼워서 여행 다니며 읽기 편할 것 같아 골랐다고 했지만 사실 난 그에게 이 책을 통해 사람 사이의 얽힘과 그 얽힘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덧글

  • 박수혁 2010/10/12 09:34 # 삭제 답글

    저는 마지막에 그 분이 뉘신지 너무 궁금합니다. 가을이 왔군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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